민변홈
기능개선요청
로그인
민변 회원전용사이트
민변 회원전용사이트
About
조직구성
회칙 및 규정
공지사항
회의결과
일정
회원광장
자유게시판
뉴스레터
회원 찾기
디지털도서관
자료 검색
월간변론
변론매뉴얼
온라인연수원
공지사항
교육영상
조직구성
회칙 및 규정
공지사항
회의결과
일정
자유게시판
뉴스레터
회원 찾기
자료 검색
월간변론
변론매뉴얼
공지사항
교육영상
About
조직구성
회칙 및 규정
공지사항
회의결과
일정
회원광장
자유게시판
뉴스레터
회원 찾기
디지털도서관
자료 검색
월간변론
변론매뉴얼
온라인연수원
공지사항
교육영상
조직구성
회칙 및 규정
공지사항
회의결과
일정
자유게시판
뉴스레터
회원 찾기
자료 검색
월간변론
변론매뉴얼
공지사항
교육영상
About 회원광장 디지털도서관 온라인연수원
조직구성
회칙 및 규정
공지사항
회의결과
일정
자유게시판
뉴스레터
회원 찾기
자료 검색
월간변론
변론매뉴얼
공지사항
교육영상
Search
[인터뷰]“민변은 나의 친정이다” 민변과의 10년 인연, 민변을 떠나는 노동위 전명훈 간사 인터뷰 외
2013-02-15
1
일반게시판
“
민변은
나의
친정이다
”
-
민변과의
10
년 인연
,
민변을
떠나는
노동위
전명훈
간사
-
인터뷰_
인턴
이광훈
,
박진선
공병기
,
김초희
녹취_
인턴
이광훈
,
박진선
매서운
추위도
어느새
누그러졌다
.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던
봄의
시작
,
겨울의
끝자락에서
민변도
어느새
이별과
더불어
새로운
만남을
준비하고
있다
.
‘
거자필반
회자정리
’
(
去者必返
會者定離
)
가
사람
만남의
어쩔
수
없는
법칙이라고는
하나
,
민변
사무실
내에는
못내
아쉬운
분위기가
그득하다
.
그러나
이
헤어짐은
결코
헤어짐이
아닐
것이다
.
지난
2
월
13
일
이른
저녁
.
서초동
아담한
카페에서
민변
노동위원회
‘
전명훈
간사'를
인터뷰했다
.
민변
인턴
(
이하
민변
) :
늘
사무실에서
만나던
분을
인터뷰이로
마주
앉게
되니
기분이
묘하다
.
인터뷰
요청에
흔쾌히
응해주셔서
감사하다
. (
웃음
)
인터뷰를
준비하며
이것저것
조사하다보니
우리가
알던
‘
전명훈
간사
’
와
‘
인간
전명훈
’
은
또
다른
것
같았다
.
대부분
인터뷰
바탕
조사자료를
페이스북을
통해
찾을
수
있었다
. SNS
를
애용하시는
것
같은데
,
일상부터
노동현안에
관한
생각
,
현장
모습까지
다양하게
쓰고
계신데
, SNS
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으신
건가
.
전명훈
간사
(
이하
전명훈
) :
페이스북을
많이
하긴
한다
.
페이스북
(
페북
)
친구
숫자가
대략
1500
명
정도는
되는
것
같다
. 2011
년
희망버스
때
다들
트위터를
많이
하지
않았나
.
김진숙
지도위원
관련해서
한진중공업
문제가
해결이
되었었고
,
트위터의
도움을
많이
받는
것을
보고
관심을
갖게
되었다
.
나는
일상의
이야기를
올리기도
하지만
,
노동위원회
이야기도
많이
올리곤
한다
.
노동위
회의
같은
것들은
아무래도
밖에
잘
전달하기가
어렵다
.
하지만
SNS
를
이용하면
나와
네트워크를
맺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알리는
것이
굉장히
수월해진다
.
그래서
노동현안을
많이
,
그리고
쉽게
알리기
위해
페이스북을
자주하는
편이다
.
어느새
습관이
된
것
같다
.
그리고
페이스북을
통해
얻는
정보들도
굉장히
많다
.
페이스북에
글도
많이
쓰지만
나와
네트워크를
맺고
있는
다른
분들의
소식도
자주
확인하는
편이다
.
민변
:
간사님
페이스북을
보면
일상의
모습들도
볼
수
있었다
.
인상
깊었던
것은
결혼
생활이었다
.
결혼
전에도
,
후에도
‘
안해
’
에
대한
이야기가
끊이질
않아
부럽다
.
보통
대한민국의
남편들은
배우자를
지칭할
때
‘
와이프
’
라고
하지
않나
?
‘
안해
’
라고
부르는
특별한
의미나
계기
같은
것이
있었나
.
전명훈
:
물론
나도
처음엔
와이프라고
부르기도
했다
.
그런데
아내가
와이프라는
말을
싫어한다
.
영어식
표현이기도
해서
거부감이
있는
것
같다
.
‘
안해
’
의
뜻은
하나의
‘
태양
’
이라고
생각한다
.
나의
‘
안
쪽에
있는
태양
’
,
‘
내
마음속의
태양
’
.
그런
뜻이다
.
당신은
내
마음
속
태양같은
존재
? (
웃음
)
그래서
‘
안해
’
라고
쓴다
.
민변
:
내가
보기엔
바로
그런
면이
보기
좋았다
.
아내분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신
것
같다
.
금슬이
좋은
비결이라도
있나
.
전명훈
:
나와
성격이
굉장히
잘
맞는다
. MBTI
성격
비교
검사를
해보니
아내와
나는
정반대의
성격이
나왔다
.
나는
ISTJ
유형인데
,
아내는
ENFP
유형이다
.
이렇게
서로
반대라서
걱정이
되었는데
,
결혼해서
살다보니까
오히려
서로의
단점을
서로가
채워줄
수
있어서
더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래서
연애를
오래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사이가
좋다
.
지난
2
월
7
일이
연애부터
결혼까지
14
주년이었다
.
민변
:
금슬이
좋다
보니
2
세도
빨리
생기신
건
아닌가
생각하는데
,
임신
8
개월째라고
들었다
.
기분이
어떤가
.
‘
아버지
’
가
될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는지
,
혹시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아버지의
상이
있나
.
전명훈
:
처음에
아내가
임신했다고
했을
땐
솔직히
난감하고
당황했다
.
임신
계획은
미리
세워두긴
했었지만
예상외로
빨리
생겼다
.
아이가
예상치
못하게
빠르게
우리에게
와줘서
마음의
준비도
잘
안되어
있었고
그래서
난감했던
것
같다
.
하지만
요즘은
출산이
다가오니까
잘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
사실
나는
아버지와
사이가
많이
안
좋은
편이었다
.
그래서
나도
나중에
자식하고
사이가
안
좋게
되면
어쩌나
하고
걱정이
된다
. (
웃음
)
그래도
나중에
아기가
태어나면
나와
아버지와의
안
좋았던
것을
넘어서는
그런
관계
,
친구
같은
다정한
아버지가
되는
것이
희망사항이다
.
민변
:
민변을
떠나는
이유도
육아를
위한
것이라고
들었다
.
태어나는
2
세에게도
본인의
‘
운동
’
경험
등을
들려
줄
생각인가
.
전명훈
:
여러
가지
선택지를
보여줄
것이다
.
군인이셨던
나의
아버지가
살았던
경로
,
내가
살았던
경로
,
모든
것을
다
이야기
해주고
다
보여줄
것이다
.
내가
살았던
삶의
경로를
강요하진
않지만
다양한
선택지
중
아이
본인과
가장
잘
맞는
길을
택하라고
할
것
같다
.
그게
아이에게
행복한
길이지
않을까
싶다
.
민변
:
‘
욕망해도
괜찮아
’
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
진보에게도
꿈꿀
수
있는
‘
욕망
’
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책이다
.
태어날
아이를
생각하면서
그
책이
갑자기
떠올랐다
.
우리
사회에서는
자녀들에게
너나없이
사교육을
시키고
,
자신의
아이가
명문대에
들어가는
욕망을
갖고
있다
.
하지만
그런
욕망을
당당하게
드러내는
쪽이
있는가
하면
,
그런
욕망을
애써
숨기는
쪽이
있다
.
보수와
진보가
서로
그런
시각의
대척점에
있는
것
같기도
하다
.
어떻게
생각하나
.
전명훈
:
나는
그러한
욕망을
숨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
세대가
서로
좀
다르긴
한데
,
내가
살았던
과거는
‘
당위
’
가
모든
삶을
지배하는
가치로
작용했던
것
같다
.
본인의
욕망이
있었어도
그걸
숨기고
감추는
것이
미덕이었다
.
그렇게
20
대를
보내고
나니
아쉬움들이
많이
생기더라
. 30
대가
되고
40
대를
눈앞에
놓고
있으니
여러
욕망들이
현실로
다가온다
.
예를
들면
,
나는
지금
‘
아이돌
’
이라던가
다
같이
가는
MT
같은
것들을
굉장히
좋아한다
. 20
대
때는
데모
많이
하고
그랬다
. 20
대에
겪었어야
할
것들을
그때
못해봐서
지금
하려고
하는
것
아니냐는
아내의
‘
냉철한
’
분석을
들으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
그런
이유도
있다고
본다
.
욕망이
있으면
숨길
필요
없다
.
드러내도
괜찮다
.
자기가
지향하는
삶의
가치와
서로
어긋나지
않게
잘
조화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자녀
교육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
아이를
낳으면
잘
키우고
싶지
않겠나
?
그런
욕망이
나의
욕망으로
투영될
수도
있고
,
개인적인
바람들이
생길
수도
있다
.
그런
욕망을
아이가
갖게
될
가치와
조화되도록
해주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
민변
:
아이를
어떻게
키우고
싶은
마음인지
.
전명훈
:
사실
개인적인
마음으론
대안교육을
시키고
싶다
.
그리고
아이가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
앞서
말했듯이
선택지를
줄
것이다
.
결정을
하는
것은
온전히
아이의
몫이다
.
민변
:
예비
아빠로서
아빠가
되기
위해
본인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한
단어로
말한다면
.
전명훈
:
‘
인내
’
와
‘
기다림
’
.
출산이
물론
나에게도
큰일이긴
하지만
아내에게
좀
더
큰
일이
아닌가
싶다
.
아내는
몸으로
겪는
일이기
때문이다
.
내가
남자로서
군대에서
힘들었던
것과
맞먹지
않을까
싶다
.
아내가
겪는
변화나
감정
,
그런
부분들을
세심하게
보듬어
주는
것들이
중요할
것
같다
.
아내에
대한
배려와
아내와
같이
육아와
살림을
하는
그런
인내
.
이런
것들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
민변
:
육아
때문에
일자리
(
민변
)
를
떠나는
것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안다
.
우려도
있을
것이고
격려도
있을
것인데
,
어떤가
.
전명훈
:
성별에
따라서
반응이
다르다
.
남성분들의
우려의
목소리가
컸다
.
한국은
가부장적
사회라
아무래도
남자가
제
나이가
되면
활동가든
아니든
간에
가정의
중심을
잡아야
되지
않겠냐는
목소리가
더
크고
,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많이
요구하지
않나
.
민변
변호사님들도
그만둔다고
하니
걱정하시는
분들이
많았다
.
육아문제
뿐만
아니라
살고
있는
지역도
옮기게
되니까
그러시는
것
같다
.
반면에
여성분들은
부러워하는
분들도
많고
대부분
지지해주시는
편이다
.
남자가
육아를
한다는
것에
대해서
호응을
많이
해주셨다
.
여기서
남녀의
차이가
조금
존재한다
.
나는
내가
육아를
하는
것이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유연하게
아내와
서로
키워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
비단
나만의
프로젝트가
아니라
공동의
프로젝트라고
생각한다
.
민변
:
그런
소신
있는
결정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
전명훈
:
지금
살고
있는
아내와의
신뢰가
가장
크고
,
역할분담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특정한
시기에
가정을
꾸리고
,
아이를
낳고
,
노년까지
같이
살아가는
것을
하나의
공동
프로젝트로
같이
완성시켜
나가는
것이다
.
이런
것들은
아내와의
신뢰가
가장
중요하지
않겠나
?
물론
내가
페미니스트인
것은
아니다
.
나도
의외로
상당히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적이다
.
외부에선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는
몰라도
집
안에선
남녀
성역할에
따른
각자의
역할을
아내에게
요구하기도
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을
바꾸어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아내도
나도
하고
있었다
.
사회과학을
공부했던
사람으로서
이러한
시스템이나
인식구조
등을
바꿔나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
민변
:
노동활동가로서
오랜
시간
공부하고
활동하셨다
.
노동
분야에서
활동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할
것
같나
.
전명훈
:
돌아보면
아주
현장
활동가는
아니었던
것
같다
.
노조
활동하면서
현장에서
일하시는
분들도
있고
직접
지원하시는
노동단체
활동가들도
있는데
,
나는
후방지원
활동가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
민변에서의
나의
역할도
그랬다
.
미시적으로
보자면
현장과
전문가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
말이다
.
거시적으로
보면
활동가라고도
할
수
있겠다
.
갈수록
활동가를
지망하는
학생들이
많이
줄어들고
있다
.
이것은
비단
학생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 90
년대
이후
학생운동이
위축된
영향도
있을
것이다
.
예전엔
학생운동을
하다가
활동가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많았었다
.
하지만
이젠
그러한
생산구조들이
많이
없어졌다고
본다
.
요즘
보면
활동가보다는
‘
인권변호사
’
를
하겠다는
친구들이
많은
것
같다
.
활동가가
되기를
꿈꾸는
분들이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한다
.
그러나
늘
응원하고
있다
.
굉장히
힘들
때가
많을
것이다
.
경제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
가정
등
집안에서의
반응
,
전망에
대한
우려
,
노후에
대한
불안
등등
걱정되는
것이
많을
것이다
.
내가
지나온
과정들을
이
친구들이
다시
겪게
될
것이라는
게
걱정스럽기도
하다
.
하지만
가치
있는
일이니만큼
격려해주고
싶다
.
자신의
신념을
지키면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활동가가
된다는
점에서
활동가는
하나의
직업일
수도
있고
본인의
전망일수도
있다
.
나는
상당히
가치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
어찌됐든
사회를
더
좋게
바꾸는데
주춧돌이
될
수
있지
않겠나
.
민변
:
활동가로서
노동운동이
가야할
방향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나
.
전명훈
:
노동운동
네트워크를
가지고
활동했던
사람으로서
해가
갈수록
노동운동이
관료화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
현장에
계신
분들은
조금
불편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
현장성같은
것들이
많이
퇴각되었고
,
힘든
상황에
처해있는
것
같다
.
최근
기아차
비정규
조합원
고
윤주형씨
장례식
과정에서의
갈등
등을
보면
그렇다
.
장례도
진행하지
못하고
했던
일
등
이런
것들이
노동운동의
관료성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
물론
관료성이라는
것이
나쁜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
하지만
운동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관료성은
그렇게
좋은
영향을
주진
않는다
.
상당
부분
제도에
포섭되기도
하고
,
운동이
가져야할
진보성도
희미해지는
측면들이
보이기도
한다
.
그런
점에서
아쉬운
마음이
있다
.
당사자가
아니라
비판하기가
좀
그렇지만
정규직
중심의
노동운동을
벗어나야
한다고
본다
.
이후
노동운동이
나아가야할
방향은
비정규직
,
이주노동자
등
새롭게
한국사회에서
떠오르고
있는
노동에서의
소수자
영역이다
.
이런
영역들에
다가가야
한다
. 87
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에
일어났던
정규직
위주의
노동운동으로는
기존의
관료성을
뛰어넘긴
힘들
것
같다
.
당장은
내
자신이
민변
노동위를
퇴직하게
되었지만
,
장기적으로는
노동영역의
소수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찾으려고
한다
.
민변
:
‘
운동권
’
이나
‘
노동문제
’
에
관심을
가지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
전명훈
: 91
년도
고
2
때
처음
집회를
나갔다
.
강경대
열사
관련
집회였다
.
명지대
1
학년생이었던
강경대가
백골단의
쇠파이프
집단
구타로
인해
사망했다
.
그
해
5
월에
‘
분신
정국
’
이
시작되었는데
,
그
때
집회를
처음
나갔다
.
나갔던
계기는
존경하던
선생님들의
해고였다
.
그
당시
나를
가르치셨던
선생님들이
전교조
1
세대였는데
,
존경하는
선생님들이
해고되시면서
받은
충격이
굉장히
컸다
.
그것이
내가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완전히
바꿔놓지
않았나
싶다
.
그
이후에도
해고된
선생님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하는
마음에서
나갔다
. 10
만
명이
신촌로타리에
나가서
노제를
했다
.
강경대
열사
노제
.
그때
최루탄도
처음
맞았다
.
대학을
가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학생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
같다
.
그리고
중간에
자퇴를
했다
.
한국외대
물리학과를
다니다
자퇴하게
되었는데
,
당시는
대학을
더
다니는
것이
운동이나
취업
모두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 (
웃음
)
이후
가톨릭대
사회학과에
편입해서
졸업을
했다
.
운동을
지속하려고
했었기
때문에
노학연대
투쟁을
많이
했다
.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노동문제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
노동을
나의
중심
화두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사회학
공부를
하면서였다
.
노동법을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2000
년도이다
.
그
때
반
상근으로
일하던
연구소에
있을
때
거제도에
내려가서
면접식
조사를
진행했었다
.
조선업종
하청노동자
실태조사였다
.
그
때
조사관으로
가서
이른바
협력업체
직원이라고
하는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만나면서
인터뷰를
했다
.
나이
드신
노동자
한분이
말씀하시더라
.
정규직
노동조합은
돈이
있어서
노동조합
변호사
등을
통해
자문을
받고
소송도
하고
그러는데
,
우리는
노조도
없고
비정규직이기
때문에
도움을
받을
곳도
없다고
.
그
때
처음으로
노동법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러면서
노무사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구체화했는데
,
그땐
내가
전과가
있어서
집행유예
받고
3
년
동안
시험을
볼
수
없었다
.
학교를
2002
년에
졸업하고
민변에서
간사
공채를
했는데
그
때
민변에
들어온
것이다
.
민변은
법률가
단체인
만큼
내가
염두에
두었던
노동법
공부에
대한
생각들이
구체화되지
않았나
싶다
.
결국
대학원에서
노동법을
전공하기도
했다
.
민변
:
활동가로서
도중에
‘
포기하고
싶다
’
라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나
.
전명훈
:
민변에
2002
년에
들어와서
2003
년까지
1
년
반을
일하고
나갔다
.
그땐
민변에서
일하는
게
힘들었다
.
민변
상근
간사들
같은
경우엔
지위가
애매하다
.
변호사
단체이고
회원들도
변호사이기
때문에
,
그
곳에서
변호사가
아닌
사람은
상근
간사뿐이었다
.
거기서
파생되는
여러
문제들에
대해서
고민도
많이
했었고
,
나의
활동을
어떻게
만들어
나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깊었었다
.
그래서
많이
힘들었다
.
그리고
또
힘들었던
시기는
노무사
시험을
준비하던
때였다
.
노무사
시험을
대학원
다니면서
준비를
했는데
, 2
차시험에서
떨어졌다
.
노무사
자격증
따고
나서
그
이후의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그것이
막혀버리니
아주
힘들었다
.
민변
:
활동가로서
나이가
들면서
본인의
열정이나
사명감이
식었단
생각을
한
적이
있었나
.
전명훈
:
열정이
식었다기
보다는
나이가
들면서
아무래도
보수화되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
.
물론
나쁜
측면의
보수화라고
보기는
어렵다
.
마르크스식으로
표현하자면
20
대에는
‘
생산관계
’
측면에서
자유로웠다
.
그
땐
부모님이
주는
용돈으로
대학
다니고
운동하다
보니까
보다
급진적으로
활동
할
수
있었다
.
하지만
사회에
나와
보니까
책임질
것들도
많아지게
되고
,
보다
복잡한
관계들을
맺다
보니
힘들어졌다
.
아내도
있고
,
처가도
있고
,
아이가
생기면
아빠도
되는
그런
관계에
있어서
본인이
책임을
져야
할
상황이
오기도
하고
,
때로는
타협을
하게
되기도
한다
.
하지만
이것들을
잘
조화시켜
나가야
한다
.
본인이
가지고
있던
신념과
지향과
이런
것들을
전체적인
맥락에서
꺾이지
않도록
잘
조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외부에서
보기에
나도
한
때
20
대에
혁명을
이야기하고
다녔지만
,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하기보단
,
이젠
내가
책임질
수
있는
이야기를
하자는
생각이
든다
.
민변
:
사회학과
법학
,
양쪽을
모두
공부한
셈인데
,
사회학과
법학
,
두
개의
학문에서
노동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른
점이
있나
.
전명훈
:
노동법을
나중에
공부해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
나는
주로
노동문제를
법을
중심으로
보게
되는
것
같다
.
하지만
사회학의
시각으로
보면
노사관계의
문제
,
구조의
문제
,
주체의
문제
,
관계의
문제
등으로
노동을
볼
수
있다
.
활동가들이
취하는
입장은
노동사회학적
인식
,
사회과학적
분석
틀
등
이러한
틀에
기반해서
움직이곤
한다
.
내가
노동사회학이
아니라
노동법을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사실
‘
학문의
자유
’
때문이다
.
학문은
자유롭지
않나
?
이런
틀
,
저런
틀을
가지고
이리저리
적용해
볼
수
있고
,
연구방법론도
다양하다
.
사회학의
단점은
추상적이다
.
반면
법은
구체적인
답을
내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
나에게는
현실적인
틀이
필요했다
.
당장
현실에서
쓸
수
있는
무기가
필요했던
것
같다
.
다만
법은
사고의
틀이
정해져
있어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단점이
있는
것
같다
.
그래서
사회학적
상상력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
민변
:
육아
이후의
계획이
궁금하다
.
광주로
내려가시는
것으로
들었는데
,
광주에서도
활동을
계속
이어나갈
것인지
.
전명훈
:
일단
단체활동
계획은
없다
.
민변
노동위원회
간사를
하면서
논문
쓰는
것을
병행하려고
했으나
여유가
나지
않았다
.
다른
것보다
우선
논문을
써서
한
단계
마무리하는
것이
필요할
듯싶다
.
생각하고
있는
주제는
작년에
문제되었던
청년유니온
,
노동조합
설립신고
등이다
.
내가
처음으로
살았던
지역이
광주가
아니라서
일단은
내려가서
적응을
하는
게
우선일
것
같다
.
그리고
나서
단체활동을
할지
안할지를
판단해야
할
것
같다
.
민변
:
민변에
참
오래
계셨다
.
전명훈
간사님께
민변이란
어떤
존재이고
,
그리고
민변에게
‘
전명훈
간사
’
는
어떤
존재인가
.
전명훈
:
나에게
민변은
친정이다
.
학부를
졸업하고
내가
사회운동을
하게
된
첫
시작이기도
하고
,
중간
공백은
있었지만
30
대
중반을
민변에서
다
보냈다
.
중간에
나갔다
다시
복귀할
때
민변은
‘
친정
같다
’
라고
느꼈다
.
민변에게
나는
어떤
존재일까
.
글쎄
잘
모르겠다
.
그것은
민변이
나에게
대답해야
하는
것
아닌가
? (
웃음
)
민변에게
나는
그럴
것
같다
.
일종의
나사같은
존재
?
중간에
잘
굴러가도록
하는
보조자
같은
존재
?
그렇게
생각해준다면
나는
만족한다
.
민변
:
민변을
떠난
후에는
광주에
오래
머무실
것
같은데
,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
서울에
많지
않나
.
특히
권영국
위원장님과의
사이가
각별하다고
들었다
.
물론
다른
분들도
걱정이지만
위원장님의
외로움이
걱정되는데
(
웃음
)
어떻게
채워주실
생각인가
.
전명훈
:
후임
간사를
잘
뽑았기
때문에
그분이
채워주실
것이다
. (
웃음
)
그리고
노동위
간사만
있는
게
아니라
여러
신입변호사님들도
계시고
,
인턴들도
있으니
,
그분들이
잘
채워주시리라
생각한다
.
민변
:
민변에
오래
계셨으니
다른
분들보다
민변의
좋은
점과
문제점
,
이런
것들이
눈에
잘
들어올
것
같은데
,
어떤가
.
전명훈
:
민변에게는
우리
사회에서
요구되는
역할이
많이
있다
.
민변에서
그런
모든
요구들에
부응하는
것은
어렵다고
본다
.
전체
회원
수에
비해
실제
활동하시는
변호사님들도
얼마
안
된다
.
그
외에도
여러
현실적인
문제들이
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문제들에
대해
좀
더
많이
응답할
수
있는
역할을
했으면
한다
.
작년에
이미
발전전략
TF
의
활동을
담은
보고서가
나왔다
.
민변의
미래를
기획해나가는
내부적인
변화의
모습들을
보여준다면
민변이
좀
더
돋보이는
자리를
차지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
노동위원회는
권영국
변호사님이
위원장을
하면서
상징성이
높아진
것
같다
.
최근
들어
노동위의
활동성이
향상된
것을
느낀다
.
그리고
예전에는
위원장
혼자
움직였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
지금은
로스쿨
1
기
, 41
기
변호사님들
중에
열심히
활동하시는
분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다
.
많은
분들이
역할을
잘
나누어서
노동위원회
업무가
위원장
한
사람에게
너무
몰리지
않았으면
한다
.
민변
:
민변과
인연을
맺은
근
10
년
동안
가장
좋았을
때와
가장
힘들었을
때는
언제인가
.
그리고
가장
인상깊었던
기억은
.
전명훈
:
좋았을
때는
타인의
인정을
받을
때다
.
소소하긴
하지만
‘
잘했다
’
라는
격려
,
‘
고생했다
’
는
격려
등을
들으면
힘들게
느껴지던
것들이
모두
사라지곤
했다
.
힘들었을
때는
여러
사례가
있다
. (
웃음
)
내가
업무를
진행할
때
느끼는
것들인데
,
노동위원회
위원들이
상근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들이다
.
예를
들어
A
위원님은
a
업무를
, B
위원님은
b
업무를
, C
위원님은
c
업무를
담당하는데
,
나는
abc
업무
모두를
종합해야
하는
지위에
서게
될
때가
많았다
.
반면
각
위원
변호사님들은
a, b, c
각각의
업무의
측면에서만
나를
보게
되는
그런
상황이
발생했다
.
작년이었던
것
같은데
물리적으로
너무
부담이
되어서
힘들었다
.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
태업을
하겠다
”
고
선전포고를
하기도
했었다
. (
웃음
)
상근자들의
공통된
힘든
부분인
것
같다
.
또
하나
힘들었던
것을
들자면
,
회원
,
상근자
모두
인간관계
속에
위치하고
있는데
,
그
인간관계에서
문제가
생길
때
풀어나가는
것이
힘들기도
했다
.
거의
150
대
1
의
접촉을
하게
된다
.
안에선
상근자들끼리
일을
해
나가면서
관계를
풀어나가기도
했지만
그런
인간관계
부분에서
문제가
생기면
아무래도
부담이
생기곤
했다
.
그것이
좀
힘들었다
.
민변
:
주변의
말씀들을
들어보면
일을
계획하고
,
칭찬받는
것을
좋아하신다고
하더라
.
그런데
보통
그런
사람들이
일
중독자라고
불리지
않나
? (
웃음
)
자신이
일
중독자라고
생각하지는
않는지
.
전명훈
:
일
중독자
맞다
.
그것으로
인해
성과를
내고
타인에게
인정받는
것을
좋아한다
.
그러나
결혼하고
나서
좀
바꾸고
조절하고
있긴
하다
.
아내와의
관계
,
가정에서의
관계
등
나
자신의
책임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조절하려고
노력한다
.
그러나
위원장님은
내가
결혼하고
나서
나태해졌다고
하시더라
.
농담
섞인
질책이셨을
것이다
. (
웃음
)
민변
:
예전에도
한번
민변을
떠나셨다가
다시
돌아왔다고
들었다
.
“
몇
번이고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힘찬
연어같은
”
간사님께
묻고
싶다
.
이번에
민변을
떠나는
것이
‘
마지막
’
이라
생각하나
. (
웃음
)
전명훈
: (
웃음
)
민변을
떠나긴
하지만
아까
말했듯
민변은
내게
친정
같은
존재다
.
그래서
민변을
떠나더라도
변호사님들
,
간사님들과도
계속
연락하고
만날
것이다
.
어쨌든
육아를
이유로
떠나긴
하지만
무언가
계속
해
나갈
것이고
,
그러면
민변과는
언젠가
다시
어떤
형태로든
만날
것이라
굳게
믿는다
.
그것이
간사라는
자리가
아닐지라도
민변과
내가
함께
나아갈
수
있는
지점
,
계기들이
있을
것이다
.
그러길
소망한다
.
민변
: 2012
년
민변
총회에서
‘
멋진회원상
’
을
받으셨다
.
지난
민변
생활
동안
자신이
생각하기에
‘
이것만은
내가
최고다
!
’
라
할만한
영역이
있나
.
전명훈
:
나는
스케줄
짜는
것이
탁월하다
. (
웃음
)
다른
민변
상근자분들도
워낙
뛰어난
분들이시라
어떤
하나가지고만
이야기하는
것은
좀
그렇다
.
내가
돋보이는
부분이
있으면
다른
분들에겐
다른
돋보이는
부분들이
있다
.
그래서
서로
상호보완적인
관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
그
외에는
특별히
잘했던
게
없는
것
같다
. (
웃음
)
민변
:
노동위원회에
후임자로
오시는
분께
응원의
메시지
부탁드린다
.
전명훈
:
민변
노동위
간사라는
자리가
다른
민변
사무처
상근자들과는
다르게
좀
더
현장성을
요구하는
자리다
.
좀
더
넓은
안목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역할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것에
충실하셨으면
한다
.
그런
것들을
잘
수행하신다면
민변과
노동위와
함께
충실한
활동가로
성장할
수
있는
자리라고
생각한다
.
여러
고민이
생기실
수도
있다
.
그러나
민변을
,
그리고
노동위를
자신의
활동공간으로
인식하고
활동해주셨으면
한다
.
민변
:
민변을
떠나면서
아쉬움이랄까
,
소회가
있다면
.
전명훈
:
돌이켜
보면
민변
노동위
간사
자리를
마치기
전에
쌍용차
문제
,
한진
문제는
꼭
해결되는
것을
보고
싶었다
.
나
또한
현장에서
노동위원장님
,
위원님들과
함께
대응해나가곤
했는데
,
투쟁에
함께
결합했던
노동위
간사로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보고
그만두었으면
좋겠다라는
희망이
있었는데
그렇게
되지
못해서
아쉽다
.
노동위
활동
중
가장
보람찼던
것은
희망버스하면서
김진숙
위원이
무사히
내려왔을
때다
.
그때
울컥
눈물이
났다
.
희망버스
때는
개인적으로
많이
힘들었다
. 1
차
희망버스에
참가하지못했고
그
후
희망버스가
5
차까지
가면서
법률지원단을
꾸려가는
모든
것을
내가
꾸려나가야했다
.
연행자들
발생하면
거기에
맞춰
접견을
가고
,
노숙을
하고
하는
것들
,
그런
것들이
그
당시에는
조금
힘들었다
.
그
당시
희망버스가
연대하고
,
결합했던
것이
가장
큰
기쁨으로
남는다
.
그게
작년
대선을
거치면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는
느낌이
들어
너무
아쉽다
.
민변
:
마지막
질문이다
.
여전히
가슴에
품고
있는
이상이
있는지
.
어떤
세상이
되기를
꿈꾸는지
묻고
싶다
.
전명훈
:
차이가
차별이
되지
않는
사회
.
내가
원하는
사회는
그런
사회인
것
같다
.
다양한
차이를
인정해주고
,
그것이
차별로
들어나지
않는
그런
세상
.
조금
더
평등하고
,
조금
더
공정하고
,
조금
더
정의로운
그런
사회를
꿈꾼다
.
나는
그런
것들이
고정된
이념으로
표현할
순
없다고
생각된다
.
그것이
사회주의일수도
,
사민주의일수도
있고
,
자유민주주의
일수도
있고
,
아니면
모두
아닐
수도
있지만
어떻게
호명되든
간에
서로의
차이들이
차별로
드러나지
않는
그런
사회를
꿈꾼다
.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일에
멀리서나마
민변과
계속
같이
나아가고
싶다
.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