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기고] 200kg의 배추, 그 이상의 마음들: 비건 김장 day 워크숍 후기 / 김도희 회원
- 2026-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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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게시판
<비건 김장 day 워크숍 후기>
200kg의 배추, 그 이상의 마음들
- 김도희(환경보건위원회 동물권소위원회)
시작은 소박했다. “동물권소위원회를 민변에 더 알리고, 동물권에 대한 인식을 높일 수 있는 회원 행사를 만들어보자!”는 한 마디에서 출발했다. 마침 윤재은 회원이 매해 지인들과 김장을 한다며 “올해는 비건 김장을 해보면 어떨까요?”라고 제안하자 모두가 엄지를 세웠다. 그렇게 만장일치로 결정이 되었고, 10월부터 본격적인 준비에 돌입했다. 운도 좋았다. 조아라 회원이 워크숍을 이끌어주실 적임자를 연결해주면서 일사천리로 길이 열렸다. 이끄미는 ‘지구여행자 레시피학교’를 운영하며 『당신의 밥상은 누구와 이어져 있나요』를 쓰신 성미선 선생님(활동명 ‘나무’). 여기에 남혜선 회원의 센스 넘치는 손길이 더해져 웹자보까지 뚝딱 완성되니, 준비 과정부터 어쩐지 ‘될 일은 된다’는 기운이 감돌았다.
행사명은 ‘2025 민변 환경보건위원회 비건 김장 day’. 주최는 민변 환보위, 주관은 동소위. 12월 6일 토요일 오후에 한살림연합 식생활센터에서 하기로 했다. 난관이 있었다면, 처음에는 참여자 20명을 목표로 했지만, 결국 동소위 회원 8명이었다는 것. 처음엔 살짝 당황도 했다. “20명이 너무 빨리 차면 어쩌지?” 하고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정작 동소위 외 신청이 없었던 것. 우리끼리 조촐하게 할지, 맨투맨으로 몇 명을 더 포섭할지 논의했으나 첫 시작이니 너무 욕심내지 말고 작지만 내실있게 진행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러던 중 추석을 앞두고 이끄미 선생님께 연락이 왔다. “제안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비건 김장하는 날 손 보태주셔서 1+1으로 김장 나눔하면 어떨까요? 전장연 활동가 중 채식을 하시는 분들을 위해 김장 선물드리고 싶어서요.” 모두가 흔쾌히 “좋아요!”를 외쳤다(실제로는 텔방에서 하트를 눌렀다). 나눌수록 커지는 것이 김장문화인데, 우리의 작은 노력으로 비건지향 단체 활동가들 식탁이 조금이나마 풍성해진다면 오히려 기쁜 일이었다.
드디어 밝은 김장날 아침. 김치통과 앞치마, 머리수건을 양손에 들고 ‘오늘의 용사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김장조끼까지 완벽히 장착한 김영주, 최지영, 윤재은 회원과 그녀의 아내 예정민님의 하이패션은 현장의 부러움을 샀다. 전남 영암에서 태명 ‘모모’(“모두 모여”의 준말)와 함께 상경한 이예지 회원, 그리고 예쁜 말씨로 모두에게 활력을 불어넣어 준 조덕상 회원의 장남 시우까지, 풍경은 이미 잔칫날이나 진배없었다.
선생님의 오리엔테이션을 시작으로 본격 작업이 펼쳐졌다. 늙은 호박과 현미 찹쌀로 풀국을 만들고, 표고버섯, 다시마, 양파, 무, 배를 갈아 넣은 후 다진 마늘·생강·청각까지 더한다. 여기에 고춧가루를 넣어 충분히 불린다. 나는 이번에 청각이란 것을 처음 봤다. 해안가 암벽에 붙어 자라는 녹조류로, 사슴뿔을 닮아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김치 담글 때 자주 쓰이는 재료라고 하는데 나만 빼고 다들 알고 있더라. 김치에 시원한 맛을 낸다니, 기대감이 고조되었다.
선생님은 간을 하기 전에 고춧가루 섞은 풀을 먼저 불리는 것이 포인트라고 하셨다. 간을 먼저 하고 고춧가루를 넣으면 매운맛만 남으니, 깊은 풍미를 살리고 싶다면 반드시 미리 불려야 한다는 것이다. 말씀대로 30분간 기다린 뒤 간장을 넣고 무채, 갓, 미나리, 대파, 쪽파를 버무리니 김치소가 완성되었다. 액젓 없이도 이렇게 깊은 맛이 나다니! 액젓 대신 간장을 넣는 것이 신기하다는 누군가의 질문에 액젓보다 간장을 쓴 역사가 훨씬 길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지난번에 내가 간장으로 깍두기를 담갔을 땐 맛이 영 별로였는데, 이번엔 간장의 존재감이 튀지 않고 오히려 재료들의 맛을 끌어올려 주어 놀라웠다.
가을무는 과장 조금 보태 돌덩이처럼 단단, 아니 딴딴했다. 세상에, 무 썰다가 오른 목덜미에 담이 왔다. 하지만 그만큼 아삭하고 달콤했다. 중간중간 채썰고 남은 무들을 간식처럼 집어 먹었다. 난 개인적으로 배추김치보다 무김치를 좋아한다. 김장의 겸손한 주인공은 어쩌면 무가 아닐까. 갈고, 채썰고, 깍둑썰고, 큼직하게 썬 무는 김치소가 되고 깍두기가 되고 석박지가 되어갔다. 우리는 시우가 까서 입에 넣어주는 귤을 아기새처럼 받아먹으며 비타민을 보충했다. 김치소를 만드는 작업, 소를 배추에 입히는 작업, 포장하는 작업이 일사불란하게 이루어졌다. 김장을 할 때 ‘다라이’가 그렇게 많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작업이 거의 끝나갈 무렵, 우리가 작업한 배추가 무려 200kg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뭔가 엄청 대단한 일을 해낸 것만 같았다. 뚝딱뚝딱 일잘러 최지영 회원의 “어쩐지 너무 힘들더라니…” 자조 섞인 읊조림이 들려왔다. 전장연 정도인 줄 알았던 김장선물 단체는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작공, 띵똥, 팔레스타인에 연대하는 사람들, 청년기후긴급행동 등까지 늘어났고, 그만큼의 김치가 산처럼 쌓였다. 장모님께 배운 김장스킬을 보유한 조덕상 회원은 김치산을 보며 우리가 사 먹는 김치의 가격에 대해 면밀히 분석해주었다. 이제 각자의 김치통에 김치를 담고는 단체와 개인 활동가들에게 보낼 김치들을 포장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선생님은 마치 마법처럼 저녁상을 차려내셨다. 강황 잡곡밥, 무전과 목이버섯전, 다양한 김치들과 나물들, 호박탕쉬, 깨두부, 그리고 청국장까지. 슴슴하면서도 재료 본연의 맛이 살아있는 정갈하고 건강한 밥상 앞에서 감탄이 절로 나왔다. 과욕을 부려 두 접시를 해치우고 나니 저녁 7시였다. 후식으로 면역력에 좋다는 쌍화차에 막걸리 한 병씩이 선물로 주어졌다. 김장 재료들도 하나같이 국산에 무농약, 유기농의 좋은 것들로만 준비해주셨는데, 그야말로 아낌없이 주는 나무-선생님의 활동명-다웠다.
이번 워크숍은 김장을 넘어 회원 간의 결속을 다져 주는 자리이기도 했다. 지난 9월 새만금 갯벌 탐방에 이어 동소위 구성원들이 한층 더 연결되는 시간이었다. 전통적인 김장에 우리가 공감하는 비건이라는 가치를 녹여 풀어내면서 지속가능한 먹거리 방식을 경험했고, 동물성 재료(액젓이나 물살이) 없이도 충분히 깊고 진한 맛을 낼 수 있다는 사실을 내 손으로 ‘증명한’ 날이기도 했다. 뭐든 체력적으로 힘든 일을 함께 겪고 나면 친밀감이 상승하는 효과는 덤. 다만 좀 더 많은 회원들이 함께 했다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도 마음 한 켠에 남았다.
집에 도착해 김치로 가득 찬 김치냉장고를 보고 있자니 왠지 올 겨울을 잘 지낼 수 있을 것만 같고, 마음도 벌써 든든, 충만해지는 기분이다. 무엇보다 이런 행사를 함께 기획하고, 실천하고, 즐길 동료들이 곁에 있다는 사실이 큰 위안이고 감사다. 이 글을 읽고 내년 비건 김장을 함께하고 싶은 분이 계신다면 사무처에 적극적으로(!) 어필해주시길. 혹시 아는가. 내년에는 민변 송년회를 김장으로 하게 될지.